-내일부터 학부모 상담 주간이니까 집에 가서 부모님께 가정 통신문 꼭 보여드리고,자,반장 인사하자. -차렷,경례! -안녕히 계세요! 교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왠지 무겁다.필통이랑 알림장 한 권 덜렁 들어있는 가방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무게감이 느껴진다. 형 못 오면 어쩌지...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가는데 영호가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간다. -우리 엄마는 무조건 놀 텐데,너네 엄마는? -...몰라, -하긴,물어볼 엄마도 없지 참, 그리곤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더니 복도 끝으로 사라져버렸다. 머리 끝까지 열이 올라서 저녁에 형아가 집에 오면 저 영호 녀석이 한 말을 고대로 일러 바쳐서 내일 아주 혼쭐을 내달라고 말해야 겠다고 결심하고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교실 앞 문이 빼꼼 열리더니 선생님 얼굴이 불쑥 튀어 ..
-확실하긴 한데,좀 찝찝하네요. -그러게, 그래도 일단 놈부터 추척하는게 맞는 것 같다. 오늘은 들어가서 쉬고, 내가 좀 더 조사 해볼게. -네,경위님, 데려다 드릴게요! -집 반대 방향이잖아, 시간도 늦었는데 안 피곤하겠어? -오늘 제 차로 이동해서 경위님 차 안 끌고 오셨잖아요,택시 타시려는 거 아니셨어요?제가 기사해드릴게요,피곤하면 뭐. 경위님 댁에서 자고 가면 되는거고? 어차피 내일도 얼굴봐야 하는데, 경위님이 피식웃더니 내 머리를 잔뜩 헝클었다. -어이구, 권 형사님,마음대로 하세요. 뭐 그런건 다 핑계고,근무중에는 무뚝뚝한 경위님인데 이렇게 퇴근하고나면 나름 좀 다정해지시는데 그게 좋아서 일부러 같이 가겠다고 조른거다. -저 오늘 술 마시고 싶은데, 역시 안되겠죠? -안된다 권 형사, 이번 사..
캘리포니아 58번 국도, 도로 변에 위치한 오가는 소님도 드문 낡은 식료품점, 주디는 카운터 뒤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지평선 아래로 해가 넘실거리며 가라앉고 있었다. 짤랑- 도어벨이 맑게 울렸고 주디는 정신을 차리고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오세요. 배꼽이 살짝 보이는 딱 붙는 블랙 목폴라에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데님 숏팬츠, 오버사이즈의 블루종을 걸친, 어깨정도 내려오는 금발을 찰랑거리며 한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눈을 맞추고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며 눈인사를 하곤 가게 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나쵸 한 봉지를 달랑 집어오더니 카운터 위에 턱 하고 올려놨다. -계산이요. -2달러예요. 철컥, 여자가 건낸 돈을 받고 카운터기를 여는데 관자놀이 위로 차가운 금속이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
더 이상은 못 참는다.아니 안 참을꺼다.안 그래도 오전내내 작업하고 점심까지 굶어가며 겨우 완성한 기획안이 이 대리한테 신랄하게 까여서 분출하지 못한 짜증이 가득 쌓여있는데 벽 너머로 들려오는 저 소리,미치겠다. 일주일정도 전에 이사온 사람인데 인사도 안하러 다녀서 얼굴도 모른다. 아마 왔었어도 내가 집에 없었을꺼다.일주일째 야근중이라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가니까. 이번에 우리 부서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서 아마 꽤나 오랫동안 이 피곤하고 예민한 상태가 지속될 것 같은데,침대에 몸을 뉘이고 잠을 청하기 시작할때마다 들려오는 저 소리, 헤비 메탈. 음악 취향 한 번 독특하다.그래 듣는건 좋다.개인의 취향이니,그런데 굳이,이 시간에. 굳이,저렇게 크게. 미치겠는거다. 야근으로 인한 육체적 피로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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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단 메이커 세 문장: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가 났다.' '그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가 그래 주었으면 했다.' *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좀 해봐. -뭔 변명, 아 시발, 진짜 이 새끼는 끝까지, 승현과 연락이 갑자기 끊겼고 이 새끼 하는 짓이 내 손바닥 안이라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대충이 짐작이 돼서 찾아왔다. 역시나, 승현은 클럽 입구에 서 있었고 이제 막 나온 것 같아 보였다. 이제라도 내게 연락을 하면 봐줘야겠다는 생각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승현의 옆에 웬 흐리멍텅하게 생긴 애가 찰싹 달라 붙어 있었다. -어라, 저 년은 또 왜 달고 다녀. 같이 놀았나보다-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둘이 호텔 라운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그 길로 ..
*In my dream 외전 조금 일찍 퇴근을 한 김에 대학로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지하철역으로 조금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와 몸이 부딪혔다. 부딪힌 사람이 휘청대며 넘어질 것 처럼 보이기에 서둘러 손을 뻗어 그 사람을 감싸 안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보고싶었던 얼굴이었다. 이 남자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꽤 오랫동안 꿔왔다. 이 사람의 꿈을 꾸지 않으면 그 하루가 찝찝할 지경이었고, 계속 보고싶었다. 만나고 싶었다. 항상 내게서 눈을 때지않고 승현씨,승현씨 하며 조잘조잘 떠들던 애가 오늘은 무슨 일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분이 별로 인 것 같아 보여 달래주려고 손을 뻗는데 잠에서 깨버렸다. 찝찝했다. ..
늘 그런 꿈을 꾼다. 낯선 그 남자를 만나는 꿈, 이제는 낯설다는 말도 붙이기 뭐하다. 꿈에서 깨고 나면 남자의 얼굴은 희미해지지만 꿈 속에선 분명하다. 진한 인상의 사람이라는 느낌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잠에서 깨어 침대에 멍하니 앉아 그 사람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는 일은 이미 일과가 되었다. 벌써 1년째 이 짓을 하고 있지만 그 남자는 희미하다. 처음 그 사람이 꿈에 나온 날은 그 해 첫눈이 내렸던 날이었다. 주변은 눈부시게 환했고 그 남자는 더 하얬다. 눈이 시려웠다. 꿈에서 깨었을 땐 이게 무슨 꿈인가 싶었다. 그 날의 기억은 다 바래졌지만 꿈 속, 눈부시던 그 느낌은, 아직까지도 방금 찍은 사진처럼 선명하다. 그 남자가 두번째로 꿈에서 나왔을 땐 겨울의 끝 무렵이었다. 얼굴이 좀 더 선명..
지용은 이제 막 이름을 알려가는 중인 인강 강사다. 강사 생활 초반에는 용모도 단정하고 학생들에게 다정해서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용의 강의실에는 여학생만큼 남학생의 수도 점점 늘어갔다. 아마 지용은 그 이유 중 수업중에 보이는 자신의 버릇인 지문을 읽다가 숨이 차오를 때 시선을 아래에 두고 긴 숨을 내쉰다던지 생각을 할 때에 입술을 물며 짓는 표정이라던지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큰 부분을 차지 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 할 것이었다. (항간에는 지용쌤의 팬클럽이 개설되었다는 소문이 나돈다. 회장이 남자라는 소문 또한...) 학기가 어느 정도 지나고 애매한 시기, 지용이 담임을 맡은 반에 승현이 신입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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