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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뇽]보니 앤 클라이드

힉님 2017. 2. 19. 22:18

캘리포니아 58번 국도, 도로 변에 위치한 오가는 소님도 드문 낡은 식료품점, 주디는 카운터 뒤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지평선 아래로 해가 넘실거리며 가라앉고 있었다.
 
짤랑-
 
도어벨이 맑게 울렸고 주디는 정신을 차리고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오세요.

배꼽이 살짝 보이는 딱 붙는 블랙 목폴라에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데님 숏팬츠, 오버사이즈의 블루종을 걸친, 어깨정도 내려오는 금발을 찰랑거리며 한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눈을 맞추고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며 눈인사를 하곤 가게 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나쵸 한 봉지를 달랑 집어오더니 카운터 위에 턱 하고 올려놨다.

-계산이요.
-2달러예요.

철컥,
 
여자가 건낸 돈을 받고 카운터기를 여는데 관자놀이 위로 차가운 금속이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온 몸의 털이 비죽 솟는 듯 했다. 상황 파악이 빨리 못하고 잠시동안 멍하니 있자 여자가 카운터 위로 탐욕스럽게 입을 벌린 검은 가죽 가방을 털썩 하고 던졌다. 다른 가게도 털고 오는 길인지 초록색 종이들이 바닥에 깔려 있는게 언뜻 보였다.

-자, 무슨 뜻인지 알지?
 
머리에 겨눈 총구를 움직이지 않고 한 쪽 허벅지를 올려 카운터에 걸터앉으며 턱짓을 하며 어서 돈을 담아 넣으라는 듯이 재촉했다.

-요즘엔 손님이 없어서, 얼마 되지도 않을 건데,
-젠장,아줌마 죽고싶어? 빨리 담기나 해.

낮게 으르렁 거리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묘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여자 목소리라고 하기엔 조금 더 낮았다. 무엇보다 일단은 살고 봐야 했기에, 갸우뚱하며 카운터기 속에 있는 돈을 몽땅 꺼내서, 그래봤자 백 달러나 겨우 넘을까 한 돈을 그 검은 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
최근들어 도시 외곽에 있는 가게를 중심으로 털고 다닌다는 강도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 소문의 주인공이 이 여자인 듯 했다.
아마 다들 이런 일은 번번히 겪어봐서 신고는 안 하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뭐, 신고도 하나마나 한 일이다. 워낙 바쁘신 경찰 양반들이시니까,

-자,2달러는 나쵸 값. 다음에 또 올게.
 
2달러를 카운터 위에 턱 올리는데 짧게 깎은 뭉툭한 손톱의 까만 메니큐어가 눈에 띄었다.

-또 오면 그땐 신고다.
-헤에, 그러던가,
웃긴 아줌마다.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무슨 다음에 오면 신고야, 오늘 털려놓구,
나름 두둑해진 돈 가방을 어깨에 척 올리고 가게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래가 잔뜩 내려 앉아 본래의 색도 가물가물한, 일단은 빨간색이었던 포드에 올라탔다.

-아, 씨발 탑, 다음엔 니가 해. 못해먹겠네 진짜
머리위에 답답하게 얹혀져 있던 거추장스런 가발을 잡아 뜯어 뒷 자석으로 휙 내던져버렸다. 가발 아래에 눌려있던 결 좋은 어두운 밤색의 머리칼들이 후두둑하고 쏟아져 내렸다.
운전대에 한쪽 팔을 걸치고 건들거리며 껌을 짝짝 씹어대던 탑이 내 속을 또 긁어놨다.
 
-왜, 니가 더 잘 어울려.
-아니, 잘 어울리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불공평하잖아! 맨날 나만 여장하고 맨날 나만 이런 짧은 바지입고 가슴에 뽕 넣고, 젠장, 춥다고! 너는 긴 바지라도 입지!
-어, 존나 섹시해
-미친 또라이 새끼, 빨리 출발이나 해. 옷 갈아 입고 싶어.
좌석 시트로 몸을 푹 기대며 말했다.
-잘 어울린다니까,
탑이 쩝 하고 입맛을 다시더니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58번 국도를 타고 달리는데 모하비 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붉은 석양이 사막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디, 매일보는데 그렇게 좋냐.
-응, 좋아.

탑이 피식하고 비웃는 소리가 들렸는데 싸우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그냥 못 들은 척 해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길게 펼쳐진 길을 따라 달리다가 호텔을 발견해 차를 세웠다.

'캘리포니아 호텔'
L자는 거의 반쯤 떨어져 달랑 거리고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어야 할 LED간판은 스산하게 깜빡거렸다. 하얀 외벽은 모래 먼지가 잔뜩 끼여 누래져 있었다.
꼴에, 호텔이랜다...
-이봐 탑...우리 언제까지 이런 호텔만 도는거야, 난 이런 곳에서 더 이상 못 잔다구
-맨날 침 흘리면서 잘만 자놓고 뭘, 그래도 차에서 자는 것 보단 낫잖아.
하곤 어깨를 으쓱했다.

듣고보니 맞는 말이다. 언젠가 자정이 다 될 때까지 호텔이 안 나와서 차에서 하룻밤을 보낸적이 있었는데, 으으,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재빨리 수긍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뭐, 안은 제법 깔끔했고 있을 건 다 있어 보였다.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벨 보이가 눈을 맞추며 웃음을 보내왔다.
내 얼굴에 게이라고 써져 있나...
뭐, 그렇게 싫지는 않아서, 벨 보이 주제에 얼굴도 좀 반반하고, 저 보라색 재킷 아래로 언뜻 비쳐 보이는 근육도 적당한 것 같고, 눈을 접어 마주 웃어주었다.

그 꼴을 옆에서 보던 탑은 혀를 찼다.
또 남자 꼬시고 있네, 엄청난 애다 진짜, 내가 볼 땐 정말 밋밋한 얼굴인데 ,저게 어디가 좋아서 저렇게 넘어올까, 정신 좀 차리라고 지디의 둥그런 뒷통수를 한 대 갈겨주었다.

-아! 왜 때려!
-빨리 올라가기나 해, 지디. 옷 갈아입고 싶다며.
-아 맞다, 응, 그래야지.
 
벨 보이 놈은 짐을 들어 준다는 핑계로 끝까지 방 앞으로 따라와 지디에거 추근덕 거렸고, 뭐 지디 본인도 그걸 즐기고 있었다.

-아, 살 것 같애. 존나 죽는 줄 알았어, 쫄티에 브라에 뽕에, 젠장, 여자들은 어떻게 이걸 맨날 하고 다니는 거야. 존경스럽다,

방문을 닫자마자 지디가 궁시렁 거리며 입고 있던 옷들을 벗어던졌다.

-벗지 말지, 잘 어울린다니까,
-대가리에 구멍 뚫리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닥쳐, 탑. 나 아직 총 들고 있어.
-까칠하기는,
 
지디는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더니 바지까지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시시껄렁한 토크쇼들만 주구장창 나오는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드디어 볼 만한 영화를 틀어주는 채널을 찾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였다. 영화가 점점 절정으로 치닫는데 다 씻었는지 지디가 뿌연 수증기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음, 샤워기에서 물이 잘 안 나오는 것 같아. 밑에 가서 얘기해야겠어, 올라오는데 보니까 자판기 있던데 뭐 뽑아다줄까?
-어, 난 콜라.
-그래, 알겠어.
-다이어트 중이니까, 코카콜라 제로 아니면 안 마실꺼야.
-엿 먹어.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더니 중지를 길게 내보이며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철제 계단을 쾅쾅 밟으며 멀어져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선잠에 들었던 것 같다.

잠결에 무슨 앓는 소리가 자꾸 들려 눈을 떴다. 고양이가 발정이 났나... 고양이 소리라기엔 너무 낮은데, 지디는 콜라 뽑으러 가서 아직도 안 왔나.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침대위에 허리를 곧게 피고 앉았다.

얼씨구, 살짝 열려있는 방문 사이로 거실이 보이는데, 예의 그 벨 보이가 나체로 지디와 뒹굴고 있었다. 지디는 쇼파 위에 길게 엎드려 허여멀건한 엉덩이만 올려놓고 벨 보이를 받아 내고 있었다. 얼굴은 쿠션에 푹 파묻고 있어서 잘 안 보이는데 팔걸이를 꽉 움켜진 손마디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쌍방합의는 맞는 거지 저거? 안 말려도 되는 거지?
 
-이봐,지디
 
내가 깊게 잠든 줄 알았는지 지디가 내 목소리에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코 끝과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는게, 눈물도 달랑 매달려 있었다. 우스운 꼴이었다.

-...왜,
연신 밭은 숨과 신음만 내뱉던 지디가 겨우 대답을 했다.
-콜라 뽑아온다 더니, 콜라는 어디가고, 내가 보고 있는데 그 짓 계속 하고 싶냐?
 
생각해보니까 괘씸하네, 보통은 그만두지 않나. 저 상황에 대화를 시도하는 나도 웃기다. 벨 보이가 내가 깨어난 걸 이제야 눈치 챈 건지 지디의 엉덩이 사이에 파묻혀 있는 페니스를 슬금슬금 꺼내려는 듯 했다.

-으으, 톰, 계속 해, 괜찮아, 빼지마,응? 아,

반쯤 빠져나간 페니스에 엉덩이를 뒤로 쭈욱 빼며 졸라댔다. 그의 행동에 벨 보이는 더욱 열이 올랐는지 거세게 들이 박았다.

지디의 신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점점 올라가는데, 누군가 문을 짜증스럽게 두들겨댔다. 문을 덜컥 열자 험상궃게 생긴 남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작작 좀 합시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아아, 옆방 남잔가 보다 하긴,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는데, 와중에도 뒤쪽에서 앓는 소리가 여러번 들려오자 남자는 조금 의아해 하는 듯 했다. 소리의 원인이 나일 줄 알았는데 계속 들리니까 당황한 거지. 내 어깨너머로 방안을 슥 훑더니 포르노 보는 거면 소리 좀 줄이라고 역정을 내곤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도 소리 줄이고 싶은데,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다시 침대에 앉았다. 전보다 방안의 공기가 야릇해져 있었다.

어느새 체위도 바뀌어 있었는데, 지디를 거의 반으로 접어놓고 박아대는 중이었다. 저러다 애 허리 나가지, 벨 보이의 움직임에 맞춰 달랑거리며 흔들리는 지디의 허연 다리가 꽤나 선정적이라 더 보고 있으면 반응이 올 것 같아서 오지 않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지디는 내 밑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귓가에 뜨거운 숨을 잔뜩 토해냈다. 급하게 밀려오는 사정감에 페니스를 꺼낼 틈도 없이 지디의 안에 사정을 해버렸다. 그에 맞춰 지디도 내 배에 사정을 했다.

길고 긴 오르가즘이었다.
 
헉,시발,설마. 한창 후희를 느끼고 있었는데 뭔가 축축했다.
설마, 설마. 망했다. 앞섬이 진득하게 젖어 있는게 느껴졌다. 젠장, 사춘기 남학생도 아니고 몽정을, 그것도 저 새끼를 상대로.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지디를 노려보며 그런 장면과 그런 소리를 듣다가 잠에 들어서 그런 거라고 너 때문이라고 잠시 원망을 하고 엉그적 엉그적 다리를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욕실바닥에 쭈그려 앉아 팬티를 벅벅 빠는데, 그렇게 비참할 수 가 없었다. 상쾌하게 새 팬티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왔다. 지디는 반대쪽으로 등을 돌리고 누워있었는데 목덜미가 울긋불긋, 화려했다.
제대로 뒹굴었구만,
 
-야,야 지디 일어나,
-어,
목이 칼칼한게 목소리가 잘 안 나왔다. 아, 목아퍼. 어제 너무 소리를 질렀나.
-야,넌 어떻게 내가 방에 떡하니 있는데 그 앞에 그 짓을 할 생각을 하냐.
-너도 했었잖아,
-언제,
-이봐 탑, 너는 나 누워있는데, 옆에서, 같은 침대에 사람이 누워있는데 콜걸 불러서 떡쳤잖아!
-어, 그때 너 자고 있는 거 아니었냐.
저 병신 진짜, 내가 말을 말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무시해버렸다.
 
-아, 지디 오늘 휴게소 털고 여기 떠버리자. 너무 오래 있었어.
-휴게소? 새로 생겼다는?
-어, 거기 보안 장치 있다니까 니가 해제하고 전기 차단기 내려 내가 바로 들어갈게.
한인 타운에서 지낼 때 친하게 지내던 해커 형이 있었는데, 어깨 너머로 배웠던 게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지,

대충 고양이세수를 하고 호텔 옆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벨 보이가 아는 체를 해왔지만 내가 또 엔조이는 깔끔하게! 라는 주의라 대충 받아 주고 말았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자 벌써 4시가 지나고 있었다. 도망 경로나 보안장치 위치, 전기 차단기 위치 같은, 살펴둬야 할 것이 좀 있었기 때문에 휴게소에 미리 가서 둘러보기로 했다.

새로 생긴 곳이라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을 안 해둬서 만일에 대비해 탑은 방탄조끼를 입는다고 했다. 은근 겁 많아 하여튼,
침대에 누워서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데 탑은 아직도 방탄조끼와 씨름 중이었다.

-너 뭐해?
-야 지디, 이것 좀 해줘 봐.
-입는 것도 혼자 못해? 아니 이걸 왜 못해, 으구 답답아, 이리와.
아직도 저릿 거리는 엉덩이를 끌고 가서 침대 끝에 걸터앉아 탑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엉덩이야, 당분간은 못 하겠다.
-아 낑기잖아, 좀.
-이리 좀 와, 가까이 와야 제대로 해주지.
조끼를 고정해주는 끈을 단단히 당겼다.

-지디, 너 입가는 왜 그래?
-아, 터졌어.

윽, 잊고 있었는데, 탑이 상기시키는 바람에 괜히 신경이 쓰여서 혀로 입가를 쓸었다. 비릿하게 피 맛이 올라왔다. 탑이 손을 뻗어 턱을 잡아 끌더니 자기 쪽으로 당겨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좀 심한데? 어쩌다가? 걔 한테 맞았냐?
-아...어제, 펠라...해주다가,
-대체,
-아니, 원래 좀 터져 있었는데, 그 새끼가 좀 컸어야지...

눈치를 좀 보더니 민망한 듯 시선을 회피하며 턱을 붙잡고 있던 내 손을 쳐내곤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 꿈을 꾼 탓인가, 자꾸 겹쳐보였다. 아침부터, 평소보다 좀,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됐어, 이리와 마저 해줄게.
하고 나를 휙 끌어당겼는데 그만 스텝이 꼬여 지디를 덮쳐버리는 꼴이 됐다. 지디의 머리카락이 하얀 침대시트위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아, 좀 위험하다. 이성은 그러면 안되는 거라고 급하게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안고싶었다. 내 품안에 품고 싶었다. 더 이상 아니라고 부정하며 묻어 둘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감정이 있었다.

-야, 지디.
-왜,
-야,
-좀, 내려가!
-한번만,
-뭐를.
-알잖아.
-몰라, 나는!
-하자.
-아, 못해, 진짜 힘들어, 나 죽어,
-안 넣을게,
-...너, 너 남자랑은 안한다며...!
-너는 괜찮아,
-안돼, 너는 안돼, 싫어, 안 괜찮아.
저런 표정으로 더 애원하면 결국 원하는 대로 해줘버리게 될 것 같아서 몸을 굴려 탑의 품을 빠져 나왔다. 진짜 쟤가 왜 저래.

-어제 그런 꼴 봐서 잠깐 정신이 헤까닥 해버린 거야, 내가 이번 한 번만 봐줄게,
-왜 나는 안돼?
-너 나랑 자면, 나 다신 너 안봐.
 
하긴 니 성격에, 어련하시겠어.
 
-그래, 미안하다, 요즘 좀 쌓였나봐.
-맞아, 너 안한지 좀 됐어. 이따 밤에 나 나가 있을게, 콜걸 불러라, 응?
-알겠어, 너. 준비는? 30분 뒤에 나갈꺼야.
-아, 잠시만 장비 챙기고, 먼저 나가있어.
 
주머니에 손을 꼽고 로비를 터덜터덜 지나쳐 나오는데 예의 그 벨 보이가 인사를 했다.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째려주고 나와 버렸다.

아, 담배 땡긴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네. 젠장, 뒤늦게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 왔다.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디가 차문을 열고 들어왔다. 차는 곧게 뻗은 도로 위를 1시간 정도 내달려서 휴게소에 도착했다.
 
-너 먼저 내려, 혹시 모르니까 차는 숨겨두고 올게.
-응,
 
탑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전기 차단기와 보안장치 위치를 대강 확인했다. 다행히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보였다. 헤에, 보안 장치가 완전 최신형이네, 돈 좀 들었겠다, 노트북과 연결하기 위한 케이블선을 꺼내려고 자갈 바닥에 쭈구려 앉아서 가방을 뒤지고 있는데 탑이 벌써 다녀 온 건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위치 다 확인했어?
-응, 지금 연결해 두려고, 최신 모델이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그래, 해지면 시작하자.
-응,
 
평소와 다름없는 분위기였는데 탑은 뭔가 안절부절해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 저도 당황스러웠겠지, 친구를 상대로 그런 말이나 해대고, 그러게 내가 생각안하고 말하는 그 버릇 좀 고치라니까, 연결하고 서버에 접속하는 걸 탑은 뒤에서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거 참, 신경 쓰이네,

-이봐, 탑, 내부 구조 안 외워도 괜찮아? 이러고 놀고 있어도 돼? 불 다 꺼지면 아무것도 안보이잖아,
-휴게소 구조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그런가,
 
벌써 땅거미가 어둑어둑 깔리기 시작했다.
 
-슬슬 들어가야겠다.
-그러게,
-문제 생기면 전화해,
귀에 꽂힌 블루투스 헤드셋을 톡톡 건들이며 말해왔다.
-응, 8시 정각에 전기차단기 내릴게.
-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방탄조끼 위로 걸친 집업의 지퍼를 턱 밑까지 끌어올리곤 입구로 탁탁 뛰어 들어갔다.
cctv파일도 지워야하고 전기차단기도 내려야 하고 보안장치도 해제하고, 평소보다 할 일이 많아져서 바쁘게 움직였다. 8시 정각이 되기 전에 보안장치를 전원을 껐는데,
아, 젠장, 일이 틀어진 것 같다. 급하게 탑에게 전화를 걸면서 cctv파일을 제일 먼저 지우고 보안장치커버에 묻어있을 내 지문을 닦아냈다.
 
-왜, 문제 생겼어?
-탑, 당장 나와, 보안장치 강제로 해제하면 경찰 쪽으로 바로 신고가 들어가게 설정을 해뒀어, 경찰이 이쪽으로 출동 했을거야,
휴게소 주인 놈이 쓸데없이 꼼꼼했다. 최신형인 걸 알았을 때 조금 더 조심했었어야했다,
-다 챙겼어?
-어, 차 어디 세워 뒀어?
-좀 만 걸으면 돼,
 
차 쪽으로 막 출발하려는데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발, 이리와,
탑이 낮게 으르렁거리더니 손목을 잡고 휴게소 뒤 창고로 향했다. 창고 안은 먼지가 자욱했는데, 탑은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모서리 바닥을 가리키며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땅 파라고...?
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곤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곧 끼익하고 바닥이 열렸다.
-와, 어떻게 알았어?
-설계도 구했거든, 내가 그 정도 정보도 없이 여길 털자고 했겠냐,
 
왠지, 잔뜩 여유를 부리더라니...
 
-이봐 여기, 창고 뒤져봤어?!

경찰관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서 조심히 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무슨 용도로 만들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성인남자 둘이 숨어있으라고 만든 용도는 아니었다. 너무 비좁았다. 탑이 숨을 쉴 때마다 내 앞머리가 이마를 간질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자꾸만 아까 침대위에서 탑이 날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그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봐, 지디 꼼지락 거리지마.
-아, 좁아서 그래, 불편하다구,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평범한 친구관계는 못될 것 이라는 걸.

언제 누구와 잠자리를 가졌는지, 가질 것 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또 서로 알고 있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심지어 서로의 앞에서 관계를 가진 적도 있었다. 물론 난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탑은 종종 그랬다. 언제나 서로의 반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뭐라고 정의내리기 애매한 사이다. 친구라 하기도 뭐 하고,그렇다고 애인은 아닌, 아마 탑도 나랑 같은 생각일 것 이다.

나는 두렵다. 헤어지는 것이 두렵다. 그래도 친구로 남으면, 헤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탑의 시선을, 진심을 늘 모른 척 해왔다.
 
-지디,
-응, 왜.
 
생각이 많아져서 멍하게 대답했다.
 
-나랑 자자.
-맨날 같이 자잖아,
-자자고,
-너는 안돼, 아까 너 안본다고 했다.
-원나잇만 아니면 되는 거잖아.
-뭐?
-원나잇으로 안 끝내면 나 계속 보는 거잖아.
-싫어,
-뭐가 그렇게 싫은건데,
 
언젠간 끝나버릴 사이가 되는게 싫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웅웅 거리기만 했다.
-니가 진지하게 누구 안 만나는 거 알아, 한 번도 안 해본 거 알아, 그러니까 나랑 해보자고,
-경찰들 다 간 것 같아, 나가자.
 
또 한 번 애써 모른 체 해버렸다.
나는 겁쟁이었다.

-차 어디 있다고?
-...저쪽에,
 
탑이 앞장서서 걸어갔고 난 그 발자국만 꾹꾹 눌러 밟으며 뒤따라갔다.
짙은 적막이 흐르는 차안에서 창밖만 가만히 보고 있는데, 며칠 전 들렸던, 아니 털었던 식료품점이 보였다.

-탑,
-뭐,
-잠깐 차 좀 세워봐,
-왜 그러는데?

유리 진열창 안으로 보이는 식료품점 안의 상태가 좀 안 좋지 못했다. 진짜 질 나쁜 강도들인 것 같았다. 3명이었는데, 덩치가 장난 아니었다.

-가보자, 응?

그 아줌마가 걱정이 됐다.

-가서 뭐하게 니가,
-내가 들어가서 시간 끌게, 니가 경찰불러.
-후우, 범죄자가 범죄자 잡는다고 경찰을 부르랜다, 알겠어,
-어, 경찰오면 바로 도망가자.
-알겠으니까, 서두르기나 해.
 
지디가 식료품점 뒷문으로 조심조심 걸어들어 가는 게 보였고 나도 차에서 조심스레 내려 안쪽 상황을 살폈다.

거절 한 번 차갑게 한다, 나 살면서 차인 거 두 번째야, 그것도 하루만에, 두 번 다 같은 사람한테, 대단한 인간이다 정말, 쓰게 웃으면 강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는데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어제 시끄럽다고 찾아왔던 옆방 남자였다. 넌 뒤졌다. 새끼야,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연락을 했다.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가서 카운터 아래로 숨어 들어갔다. 한 명만 카운터 앞을 지키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안쪽으로 들어갔는지 없었다. 아줌마도 안 보였다.
안 계신건가,
상황을 살피다 그만, 뒤 쪽으로 쌓여있던 통조림 더미를 쓰러트려 버리고 말았다.
 
-뭐야, 이 새끼는, 야 마틴 여기 누가 있는데?

머리가 벗겨진 사내가 가게 안 쪽으로 소리를 높여 마틴을 찾았다. 안 쪽에서 독보적인 덩치를 가진, 마틴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걸어 나왔다.

-알바생인가, 왜 아까는 없었지, 얘도 묶어서 데리고 들어가.

윽, 간만에 착한 짓 좀 해보려다가 제대로 걸렸다. 그래도 탑이 지금쯤이면 신고를 했겠지 싶어서 조금 안심하고 있었다.

팔을 뒤로 꺾어 단단히 묶더니 가게 안 쪽의 창고로 나를 집어 던져 넣었다. 아, 좀 살살 다루지. 고꾸라져 쓰러진 몸을 바로 앉히고 강하게 묶인 팔목이 저려와 이리 저리 움직여 보면서 창고 안을 둘러 보는데 구석에 묶여있는 아줌마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무릎으로 기어갔다. 감시하던 한 녀석이 패거리들이 모여 있는 카운터로 가는 것을 보고 아줌마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아줌마, 경찰 불렀으니까 좀 만 참으세요.
-너, 그 때 그 사람이구나, 또 오면 신고한다고 했지?
못 알아 볼 줄 알았는데, 조금 놀랐다.
-와, 어떻게 알았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니가 여길 또 오냐,
-헤에, 범인은 사건 현장으로 다시 돌아온다잖아요.

그때도 느꼈던 거지만 제법 강단있는 아줌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대화가 통해서 아줌마랑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경찰이 확성기를 통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내가 쫄리네, 역시 사람은 죄 짓고는 못 사나봐.

경찰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패거리가 웅성웅성 하더니 그 중 한 명이 성큼성큼 걸어와 바깥쪽에 앉아 있던 날 끌고 나갔다. 악, 왜이래, 그러더니 내 관자놀이에 총구를 갖다대고 경찰들을 협박했다. 날 쏴버리겠다고, 아이고 병신아...별 지랄을 다 떤다, 그냥 얌전히 잡히지. 인질이 등장 할 줄 몰랐는지 경찰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주고 받더니 곧 이어 총을 내려 놓을테니 그 쪽도 인질을 풀어 주라며 타협을 해 오기 시작했다.그 순간 게중에 신입이 끼어 있었던 건지, 실수였던 건지, 경찰관 중 한 명이 이 쪽을 향해 총을 발포했고, 날 붙잡고 있던 남자 옆에 있던 남자가 허벅지를 잡고 쓰러졌다. 아, 뭔가 잘 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하더니 내 머리에 들이밀었던 총을 철컥하고 장전했다. 기이익,하고 방아쇠를 잡아 당기는 소리가 선연하게 들렸다. 마치 머리 안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처럼, 죽음에 직면했다는 것을 직감했고 눈을 질끔 감았다. 탑이 했던 고백을 떠올렸다. 나랑 자자가 뭐야, 원체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라 그 정도 말하는 것에도 엄청나게 노력을 했을 터였다.

그 생각을 하니, 이런 상황에 처해서도 웃음이 났고, 끝까지 그의 감정에, 그리고 나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됐다. 조금은 솔직해도 좋았을 텐데,
 
철컥, 방아쇠가 끝까지 당겨졌고, 빈 탄창이 헛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 새끼들, 빈 총으로,
허탈함에 눈물이 다 났다. 경찰들이 권총에 탄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순식간에 처들어와서 강도들을 제압했고, 내 팔목을 결박했던 밧줄도 모두 풀어주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카운터에 털썩 기대어 앉아 버렸다. 탑이 혼란 속을 뚫고 들어오더니 내 발치에 등을 둥글게 말아 쪼그려 앉았다.

-그러게 왜, 나서서,
바보같이, 말끝이 잘게 떨리는 게 다 들렸다.
-걱정했냐,
-아니.

벌떡 일어나더니 내 어깨위에 자신이 입고 있던 집업을 걸쳐 두고는 경찰관에게 다가가서 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곧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상황 설명 다 했고,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서 서 까지 같이 안 가도 괜찮대,
-응, 나 좀 일으켜 주라.
맞잡아 오는 손이 땀으로 젖어 척척했다. 이 정도로 걱정을 하게 만들었나 싶어 조금 미안했다.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다, 그치?
-후, 그래.

화가 난 건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내려,
-잠깐만, 모른 척 해서 미안해.

갑자기 말을 시작하자, 탑의 얼굴에 물음표가 진하게 서렸다.

-이해 못 한 척 하고, 솔직하지 못해서 미안해, 아까 그 새끼가 내 머리에 대고 방아쇠 당기는데, 후회되더라,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솔직해지지 못 했을까 하고,

탑은 내 눈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원래 그렇게 용기가 없었나, 하고, 이제 너한테도, 나한테도 좀 솔직해지려고.

흑연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탑,
-괜찮아, 안 늦었어,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굳어있던 팔을 뻗어 지디를 품에 안았다. 아까는 정말 하늘이 노래졌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내기 들어갔어야 했다고 수 백번, 수 천번을 후회했다.

 호텔로 돌아와서 이불를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서로 마주보며 누웠다.
-이러고 누워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지디가 손끝으로 어깨를 슬슬 쓸었다.
-좋다.
말갛게 웃어보이더니 조금 더 가까이 붙어왔다.
-좋아,따뜻해.
팔을 크게 둘러 품 안으로 끌어앉았다
-빨리 자,오늘 피곤했잖아.
작게 알았다고 대답을 하곤 갑자기 속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탑, 바로 잘꺼야?아까는 나랑 자고 싶다며.
-니 머리속에는 그거밖에 안 들어 차 있냐,참고 있으니까 닥치고 잠이나 자.
-왜?내가 빼줄게,
-아,됐어,필요없어. 빨리 자기나 해.
분위기가 너무 간질거려서,익숙하지가 못해서 탑한테 장난을 걸었더니 나를 품안에서 떼어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날 쳐다봤다. 조금 웃는가 싶더니 자기 볼을 내 머리위로 가득히 부벼왔다.
그렇게 늦은 밤, 달빛이 세상을 온통 물들일때까지 투닥거리다가 서로를 품에 앉고 단 잠에 빠졌다.

인질로 잡히고 나서 지디는 깨달은 것이 있었는지 사람은 죄 짓고 사는 게 아니라며, 범죄에서 손을 털고 주디 아줌마를 도와 식료품점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나는 캘리포니아 호텔에서 벨 보이 파트타임...으로 일 자리를 구했고, 아,알고보니 주디 아줌마는 엄청난 부자였다. 식료품점 어딘가에 전 재산을 보관하는 금고를 숨겨놨다고 했는데, 그 강도 패거리들이 어떻게 알고 그걸 털어가려고 찾아온 것 이었다고 했다. 아줌마는 우리를, 물론 특히 지디를 이쁘게 봐주셨고, 식료품점 근처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해 주셨다. 물론 집세는 지디 월급에서 조금씩 까기로 했다.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르는 관계였지만, 누구나 그렇게 시작하는 거니까, 나도 용기를 냈고, 지디도 용기를 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우리 둘 사이에 부옇게 끼어 있던 짙은 안개는 걷혔다.
화염을 뜨겁게 뿜어대는 태양이 솟아오른 모래 언덕 위로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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